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정말 마음이 가라앉을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왜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affect labeling 연구를 바탕으로 쉽게 소개합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정말 마음이 가라앉을까?
이상한 날이 있습니다.
분명히 큰일이 난 건 아닌데, 마음이 계속 어수선한 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는 잘 모르겠는 날.
“괜찮아?”라는 질문을 받으면 일단 “괜찮아”라고 답하지만, 사실 괜찮은 건 아닌 날.
그럴 때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좀 그래.”
“기분이 별로야.”
“뭔가 힘들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말만으로는 마음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힘들다” 안에는 서운함이 있을 수 있고, 불안이 있을 수 있고, 지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억울함, 허무함, 외로움, 민망함, 실망감이 한꺼번에 엉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감정이 이름 없이 뭉쳐 있을 때, 마음은 종종 더 커 보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정에 조금 더 정확한 이름을 붙이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주 조금 정리될 때가 있습니다.
“아, 내가 화난 게 아니라 서운했던 거구나.”
“불안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부담스러웠던 거구나.”
“슬픈 게 아니라 조금 허무했던 거구나.”
이런 순간,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감정이 나를 완전히 덮치는 느낌은 조금 줄어들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을 정서 라벨링(affect labeling)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말이나 글로 하나씩 불러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단순해 보이는 행동은 실제 연구에서도 꽤 오래 다뤄져 왔습니다.
감정을 말로 부르는 일은 왜 도움이 될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왜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가장 유명하게 언급되는 연구 중 하나는 Matthew Lieberman과 동료들의 2007년 fMRI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감정적인 얼굴 사진을 볼 때, 그 감정을 말로 라벨링하는 과제가 뇌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폈습니다.
연구진은 감정을 언어화하는 과정이 전전두엽 영역의 활동과 관련되고, 동시에 감정 반응과 자주 연결되는 편도체 활동 감소와 관련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하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이 연구가 말하는 것은
“감정 이름을 붙이면 모든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다”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감정을 말로 부르는 행위는, 적어도 일부 상황에서 감정에 휩쓸리기만 하던 상태에서 한 걸음 떨어져 감정을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방 안에서 갑자기 알람이 울리면 우리는 당황합니다.
무슨 알람인지 모르면 더 불안합니다.
화재 경보기인지, 휴대폰 알림인지, 세탁기 종료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면, 소리가 바로 멈추지 않더라도 반응이 달라집니다.
“아, 이건 세탁기 소리구나.”
감정 이름 붙이기도 조금 비슷합니다.
감정을 없애는 스위치라기보다, 감정의 정체를 확인하는 표시등에 가깝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은 ‘나’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된다
우리가 “나는 엉망이야”라고 말할 때와
“나는 지금 지쳐 있어”라고 말할 때는 느낌이 다릅니다.
첫 번째 문장은 나 전체를 평가합니다.
두 번째 문장은 지금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꽤 큽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야.”
“나는 지금 예민함을 느끼고 있어.”
“나는 망했어.”
“나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나는 못된 사람이야.”
“나는 지금 질투심을 느끼고 있어.”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나와 감정 사이에 아주 얇은 간격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간격은 감정을 부정하기 위한 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을 더 정확히 보기 위한 거리입니다.
Jared Torre와 Matthew Lieberman은 2018년 리뷰 논문에서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을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며,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이 의식적으로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쓰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정서 조절과 유사한 효과를 보일 수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감정 이름 붙이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와 다릅니다.
“별일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재해석하는 것과도 조금 다릅니다.
그보다 먼저 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그 과정이 감정 이름 붙이기의 시작입니다.
“힘들다”보다 “서운하다”가 나을 때
우리는 보통 감정을 넓은 단어로 뭉뚱그립니다.
힘들다.
짜증난다.
우울하다.
불안하다.
별로다.
이런 단어들은 편합니다. 빨리 말할 수 있고,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너무 넓은 단어는 때로 마음을 더 흐릿하게 만듭니다.
특히 “우울하다”는 말은 일상에서 아주 자주 쓰입니다.
Threads 같은 공간을 보다 보면, “그냥 우울해”라는 짧은 문장을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 말은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 사람의 하루가 무겁고 가라앉아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쓰는 “우울하다”는 말에는 때로 여러 감정과 상태가 한꺼번에 담겨 있어, 그 말만으로는 마음의 결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울함 안에는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대하던 마음이 꺼진 실망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 공허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탓하는 죄책감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함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우울해”라는 말을 쓰더라도, 사람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해”라는 말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우울함 안에 어떤 감정이 함께 있었는지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 우울함은 슬픔에 가까울까?”
“무기력에 가까울까?”
“외로움일까, 공허함일까?”
“실망감일까, 막막함일까?”
이렇게 생각해본다고 해서 우울함이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울해”라는 큰 덩어리 안에 어떤 감정이 들어 있는지 조금 더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울함”은 일상에서 느끼는 우울한 기분을 가리킵니다.
우울한 기분이 오래 이어지거나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면, 감정 기록만으로 견디려 하기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울하다”뿐 아니라 “힘들다”라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 말만으로는 내 마음이 어떤 이유로 힘든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너무 힘들었다”라고만 기록하면, 나중에 다시 봐도 무엇이 힘들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몸이 피곤했던 걸까요?
사람에게 서운했던 걸까요?
일이 버거웠던 걸까요?
미래가 불안했던 걸까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냥 공허했던 걸까요?
반대로 이렇게 기록하면 조금 달라집니다.
“오늘은 지침과 서운함이 같이 있었다.”
“일은 끝냈지만 마음 한쪽에 인정받지 못한 느낌이 남았다.”
“불안이라기보다는,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많다는 압박감에 가까웠다.”
이 기록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름 붙인 감정은,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피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불안하다면 필요한 것은 정보일 수 있습니다.
서운하다면 필요한 것은 대화일 수 있습니다.
지쳤다면 필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휴식일 수 있습니다.
허무하다면 필요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의미를 다시 찾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감정의 이름이 달라지면, 내가 살펴봐야 할 필요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감정을 자세히 말하는 것은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을 자세히 말하는 것을 조금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이런 것까지 이름 붙여야 하나?”
“그냥 넘기면 되는 거 아닌가?”
모든 감정을 매번 분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감정 보고서를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감정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 채 계속 넘기다 보면, 마음은 점점 한 단어로만 기록됩니다.
“힘듦.”
그리고 삶의 많은 날들이 같은 색으로 뭉개집니다.
사실 감정을 자세히 말하는 일은 유난스러움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덜 거칠게 대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커피 맛은 산미, 바디감, 고소함, 쓴맛으로 나눠 말합니다.
날씨도 습한 더위, 건조한 추위, 눅눅한 장마, 선선한 바람으로 구분합니다.
음악도 잔잔하다, 벅차다, 쓸쓸하다, 몽환적이다, 따뜻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에 대해서는 너무 자주 “좋다”와 “나쁘다”만 씁니다.
마음도 조금 더 다양한 단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감정 이름 붙이기는 만능이 아니다
여기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지만, 감정 이름 붙이기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에서, 항상 같은 효과를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Kircanski와 동료들의 연구에서는 거미 공포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거미를 마주하는 노출 상황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게 했습니다. 연구 결과, 감정에 이름을 붙인 집단은 1주 후 재검사에서 다른 집단보다 긴장도를 보여주는 피부전도반응이 더 낮게 나타났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또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한 집단과 비교했을 때, 감정에 이름을 붙인 집단은 거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동도 보였습니다. 다만 이 차이는 강하게 단정하기보다 조심스럽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1주 후 재검사에서 감정에 이름을 붙인 집단은 다른 집단들과 비교했을 때, 스스로 보고한 두려움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 몸의 반응, 행동, 주관적 느낌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변하지 않습니다.
연구 결과만 보면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불안하다”라고 적었다고 해서 바로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서운하다”라고 인정했다고 해서 관계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쳤다”라고 이름 붙였다고 해서 몸이 갑자기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감정 이름 붙이기가 모든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어려움이 오래 이어지거나 혼자 감당하기 버겁게 느껴진다면, 기록과 함께 전문가의 도움을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많은 순간에, 감정 이름 붙이기는 작은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없애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
판단하기 전에 불러보는 것.
나를 몰아붙이기 전에 지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그 정도의 작은 시작입니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가장 짧은 기록법
감정 이름 붙이기는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긴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장을 잘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날의 마음을 멋지게 포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처음에는 아주 짧아도 충분합니다.
오늘의 감정을 하나만 고른다면 무엇일까?
그 감정은 몸의 어디에서 느껴졌을까?
그 감정은 언제 조금 커졌을까?
그 감정 아래에 다른 감정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예를 들면 이렇게 적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불안.”
“불안 아래에 부담감이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퇴근 후에도 머리가 계속 일 생각을 했다.”
“사실은 일을 못할까 봐 불안한 게 아니라, 혼자 감당하는 느낌이 힘들었다.”
또는 더 짧게도 가능합니다.
“오늘의 감정: 지침, 서운함.”
“이름 붙이자면, 조용한 소진.”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정 기록은 문학 작품을 쓰는 일이 아닙니다.
나를 증명하는 일도 아닙니다.
하루를 평가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오늘의 마음을 너무 빨리 지나치지 않는 일입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도, 조금 선명해질 수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마음이 곧바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이름을 붙여도 여전히 아픕니다.
어떤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하나의 단어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마음은 시간이 지나야만 이해됩니다.
그래도 이름을 붙이는 일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름 없는 감정은 종종 나를 전부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름 붙은 감정은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나는 엉망이야”에서
“나는 지금 서운함을 느끼고 있어”로.
“오늘은 그냥 최악이야”에서
“오늘은 지침과 허무함이 같이 있었어”로.
이 작은 변화가 마음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오늘의 감정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보는 시작은 될 수 있습니다.
감정 기록은 감정을 없애는 스위치가 아닙니다.
오늘 내 마음에 어떤 이름이 붙어 있는지 알아차리게 해주는 작은 표시등에 더 가깝습니다.
오늘의 마음이 아직 긴 문장이 되지 않았다면, 하나의 감정 이름만 남겨도 괜찮습니다.
Daily-ONVE는 그런 작은 표시등 하나를 켜는 조용한 공간이 되고 싶습니다.
참고한 연구
- Lieberman, M. D., Eisenberger, N. I., Crockett, M. J., Tom, S. M., Pfeifer, J. H., & Way, B. M. (2007). Putting feelings into words: Affect labeling disrupts amygdala activity in response to affective stimuli. Psychological Science, 18(5), 421–428. https://doi.org/10.1111/j.1467-9280.2007.01916.x
- Torre, J. B., & Lieberman, M. D. (2018). Putting feelings into words: Affect labeling as implicit emotion regulation. Emotion Review, 10(2), 116–124. https://doi.org/10.1177/1754073917742706
- Kircanski, K., Lieberman, M. D., & Craske, M. G. (2012). Feelings into words: Contributions of language to exposure therapy. Psychological Science, 23(10), 1086–1091. https://doi.org/10.1177/0956797612443830